Transparenzgesellschaft/Byung-Chul Han/ 2014투명성에 대한 반론한병철은 우리의 지레짐작을 거부한다. 그의 전작 <피로사회>에서는 ‘긍정성’의 과잉*을 말하여 우리를 놀래 놓더니, 이 책 <투명사회>에서도 우리들의 상식을 뒤집어놓기는 마찬가지다. * ‘긍정성’의 과잉 : 긍정성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란 뜻이다. 왜냐면 긍정성이 과잉된 사회에서는 누구나 자기 착취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타자의 부정성이 사라진 마당에 나는 누구랑 대결할 수 없어서 자기 자신과 싸울 수밖에 없다. ‘너 이것 해야 한다’ 같은 강제와 금지가 있는 사회보다 ‘우리 이것 할 수 있다’ 같은 과잉 긍정이 있는 사회가 우리에게 더 폭력적이다. 우리는 투명한 사회를 지향한다고 흔히 말한다. 그런데 이 책은 그 투명성에 대한 반론이다. 투명사회에서 인간은 개성과 감정을 잃고 평준화된 기능만 작용한다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 노출된 개인은 자기의 생각과 감정이 말라버리는 폭력을 당한다.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이 점점 더 투명해지면 우리는 꼼짝달싹할 수 없는 감옥에 갇히는 꼴이란다. 내 정보가 온라인에 다 노출되었다고 생각해 보라. 타인의 시선을 견딜 수 없어서 바깥에 나갈 수가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대부분 문장이 철학적 명제로 이루어져 있다. 아무 페이지나 펼치고 눈에 들어오는 문장을 제시하면 우리는 수많은 토론과 대화를 할 수 있다. 그만큼 이 책은 연역적이다. 연역적이어서 시적(詩的)이다. 귀납적이 아니어서 비과학적이다. 비유컨대 연역은 조소(彫塑)이고, 귀납은 조립(組立)이다. 조소는 뼈대를 먼저 만들고 거기에 살을 붙여간다. 조금 어그러져도 괜찮다. 뼈대가 있으므로 살 같은 것은 몇 개 버려도 되고, 몇 개 뜯어고쳐도 된다. 만들다가 말아도 된다. 그래도 작품이 된다. 반면에 조립은 모든 부품이 각각 정확해야 한다. 부품 하나도 버려서는 안 되고 하나도 고칠 수 없다. 그것들이 모두 모여 정확한 자리를 차지해야 전체를 이룬다. 그래서 하다 말면 언제나 미완성이다. 긍정사회에서부터 시작하여 전시사회, 명백사회, 포르노사회, 가속사회, 친밀사회, 정보사회, 폭로사회, 통제사회로 이어지는 각 장의 소제목들은 모두 동의어이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투명사회는 행복한 사회가 아니다’라는 단 한 마디이며 각 장에서 그것이 반복 서술되고 있을 뿐이다. 설명을 위해서 동원되는 개념들도 표현을 달리하며 나타나는 동의어투성이다. 긍정성, 투명성, 전시성, 디지털, 포르노, 외설, 가속화, 탈서사화, 자기착취, 통제사회는 모두 같은 말이다. 부정성, 불명료함, 제의가치, 서사, 에로스, 쾌락, 은밀함 등도 서로 바꾸어 써도 다르지 않은 뜻의 말이다. 이렇게 동어 반복으로 이루어진 책이 이토록 긴장감을 주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이 책이 던지는 사유의 충격 때문일 것이다. 상식을 뒤집고 특별한 시각에서 바라보게 하는 힘 때문일 것이다. ‘투명사회는 곧 획일적 사회가 된다.’(p.15) ‘디지털 파놉티콘의 수감자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여기에 자유의 변증법이 있다. 자유는 곧 통제가 된다.’(p.102) 저자의 말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 말에 대해서 비판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투명한 사회를 만들자’하는 우리의 정치적, 사회적 신념을 위해 변명하고 싶은 것이다. 저자는 투명성은 모든 것들을 같게 만들어가는 시스템적 강제력을 가진다고 말한다. 그 속에서 인간은 개성이나 감정을 잃고 평준화하여 정보만을 공유하는 기능적 요소로만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을 듣다 보면 투명사회라는 것은 모든 것이, 사회의 모든 속성이 유리와 같이 투명한 것으로 되어있어서 마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알 천지로 보인다. 여기에서는 인간의 지극히 사적인 감정도 훤히 다 들여다보이며, 타인의 시선에 노출된 개인의 생각과 감정은 탈색되어 버리는 폭력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너무 기계적으로, 혹은 너무 극단적으로만 본 것이 아닐까? 투명한 곳에서도 인간의 생각과 감정은 여전히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정보와 커뮤니케이션만이 긍정성의 과잉 속에서 가속화 하고, 인간의 생각과 감정은 부정성을, 그 방향과 의미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인가? 아니다.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이 더 투명해질수록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생각과 감정은 오히려 더 부정성이 강화되어 방향과 의미를 획득하려고 몸부림칠 것이다. 한병철의 생각에 저항하고 싶은 내 생각이다. 투명사회는 갑을 관계가 아니다. 즉 모두를 투명한 파놉티콘*에 가두어 전시하고 나는 밖에서 그들을 감시하는 체제가 아니다. * 파놉티콘(panopticon) : 영국의 철학자이자 법학자인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일종의 감옥 건축양식을 말한다. 파놉티콘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모두 를 뜻하는 pan 과 본다 를 뜻하는 opticon 을 합성한 것이다. 즉 감시자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모든 수용자를 감시할 수 있는 형태의 감옥이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1975)에서 벤담의 파놉티콘 개념을 부활시키고 고찰하였다. 그것은 한 명의 권력자가 다수를 감시하는 규율 사회 로의 변화를 상징한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전자 혹은 정보 파놉티콘의 사회로 불리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접어들면 이러한 현상은 더 심화할 것이다. 초연결 사회의 등장, 1조 개가 넘는 감지기들, IoT와 AI가 만들어내는 빅데이터와 초지능은 우리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갈지 모른다. 그런데 정보 파놉티콘의 사회가 되면서 파놉티콘은 진화하였다. 감시자가 피감시자를 감시하지만 동시에 그 피감시자도 또한 감시자를 감시하고 있다. 즉 소수의 감시자와 다수의 피감시자 간의 구도가 무너지고 모두가 서로를 감시하는 상황이 조성된다. 우리는 이러한 구조를 ‘동시에’를 뜻하는 접두어 ‘syn’을 붙여 시놉티콘(synopticon)이라고 부른다. 지난겨울 박근혜 퇴진 촛불 시위는 피감시자인 대중이 감시자인 권력자를 감시하는 사회가 도래하였음을 입증하였다. 시놉티콘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베를린 훔볼트대학교 도서관은 시놉티콘의 긍정적 힘을 활용한 곳이다. 개인적으로 은폐된 곳에서보다 개방되고 공유되는 곳에서 사람들은 독서에 더 집중한다. 도서관에서의 공중도덕도 잘 지킨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파놉티콘의 밖에 있지 않다. 그저 상대적으로 나를 제외한 모두가 나의 파놉티콘에 전시되어 있다고 상상할 뿐이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자신의 정보를 낱낱이 알리며 커뮤니케이션을 할 뿐이지, 내가 그들에게 모든 정보를 노출했다고 해서 그들의 호모 사케르*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 호모 사케르(Homo sacer) : 로마 시대 ‘평민 의결을 통해 죽여도 살인이 되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이들을 ‘신성한 자’라고 불렀다. 마음대로 죽여도 되는데 신성한 사람이라고 불리는 모순에 주목하면서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주 아감벤은 이 말을 되살려 썼다. 그는 현대 ‘정치’의 의미를 규정하면서, 주권을 가졌다는 ‘신성한’ 인민이 마음대로 죽임을 당하는 ‘벌거벗은 생명(호모 사케르)’이 된다고 했다. 이 책이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이전에 나는 이런 글을 썼다. 사람들은 왜 익명으로 말을 하고 싶어 할까? 누구든 등 뒤에 있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내가 앞에 있으면 언제 칼 맞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익명의 커튼 뒤에 숨어 사람들을 쳐다보면 나는 안전하고, 또 나는 네가 한 짓을 모두 알고 있고, 또 너는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니 나의 것을 빼앗을 수도, 나의 삶을 훼방 놓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모든 익명의 군중 앞에서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백일하에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수많은 결점을 여러 사람 앞에 모두 보여준다. 나는 이런 결점투성이의 사람이라고 까발려 보여준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렇게 모든 걸 시장에 내놓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두려운 존재로 부각한다. 자신의 결점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를 사람들은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는 이 세상에서 자신을 버렸기 때문에 오히려 이 세상을 모두 가진 것이다. 그대들, 익명의 커튼 뒤에서 나와 무대에 발가벗고 서라. 그러면 나를 쳐다보는 저 관중들보다 우월하게 되리라. 저 단단히 차려입은 익명의 관중들은 나에게서 찬란한 두려움을 느끼리라. 나 자신을 투명하게 만드는 것은 위대한 행위다. 만약에 아무도 투명해지려고 하지 않는 사회라면 더욱 그렇다. 그 행위 자체가 부정성의 극대화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모두 자신을 감추려 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당연한 긍정으로 자리 잡을 때, 나만이 홀로 투명하게 드러낸다면 그것은 능동적 부정성의 회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만약 모두가 투명해지려고 한다면, 혹은 투명해질 수밖에 없는 사회라면? 그래도 위대한 행위가 된다. 왜냐면 자신을 감추려 하는 것은 소유와 욕심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투명해진다는 것은 소유와 욕심에서 벗어난 부정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빈틈의 부정성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는 행복이 없는 사회다’(p.20)
피로사회 로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신작!
투명사회는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새로운 통제사회다
투명함 이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낸다는 믿음 아래 자신의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전시하며 스스로 디지털 통제사회 를 완성해나가는 현대인에게 던지는 경고! 투명성을 절대적 가치로 생각하는 독일 사회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문제적 저작!
오늘날 투명성은 신뢰 를 낳는다고 여겨진다. 정부나 의회 등 국가권력의 의사결정 과정이 투명해지거나, 기업의 자금운용이 투명하게 공개된다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좀 더 신뢰할 수 있는 사회가 되리라 믿는다. 결국 투명성은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정보의 자유, 더 높은 효율성을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모든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통제사회가 된다고 말한다. 투명성이 낳는 것은 신뢰사회가 아니라 통제사회다. 무제한의 정보가 무제한적으로 커뮤니케이션되고, 네트워킹 되는 순간 우리를 둘러싸는 것은 무제한의 감시자들이다. 인터넷이나 SNS룰 통해 너무나 자발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공개하고 있는 우리들은, 알게 모르게 거대한 디지털 통제사회 의 건설에 기여하고 있는 셈이다. 그의 통찰이 아프고, 예리하다.
투명사회는 통제사회, 감시사회다.
한국어판 서문 5
투 명 사 회
긍정사회 13 | 전시사회 28 | 명백사회 38 | 포르노사회 48 | 가속
사회 63 | 친밀사회 72 | 정보사회 78 | 폭로사회 87 | 통제사회 93
| 미주 103
무 리 속 에 서 ― 디 지 털 의 풍 경 들
서론 113 | 존경 없이 115 | 격분사회 124 | 무리 속에서 127 | 탈
매개화 136 | 영리한 한스 144 | 이미지로의 도피 152 | 손에서 손
가락으로 158 | 농부에서 사냥꾼으로 166 | 주체에서 프로젝트로
176 | 대지의 노모스 183 | 디지털 유령 188 | 정보의 피로 195 |
재현/대표의 위기 200 | 시민에서 소비자로 205 | 완전한 생의 프로
토콜 210 | 심리정치 217 | 미주 223
역자 해제 227
카테고리 없음